최근에도 장애인 가족이 장애인을 살해하고 자신도 따라 죽으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학대와 차별은 여전하다.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할 경우, 장애인 가족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게 된다.

장애인의 권리를 구제받고자 법에 호소하여도 사법 당국은 증거가 충분한가와 학대나 차별이 아니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며 장애인에게 세상에 어떤 기대도 미련도 가지지 못하게 만들기 일쑤다. 피해자가 너무나 아파서 그 아픔을 호소함에도 그 아픔을 품어주거나 치료해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데에 그런 문제까지 신경 쓰기를 외면해 버린다. 때로는 법과 제도는 사각지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며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치부해 버리고 아무런 가책도 가지지 않는다.

추석 명절에 이런 사건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두가 오손도손 가족애를 느끼고 정을 나누며 행복을 나누는 시기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가족끼리 나눌 것이 아무것도 없고 한숨만 쉬어야 하고,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를 생각하면 죽음이 오히려 행복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재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 부재로 장애인이 희생되어도 왜 장애인을 보호하지 못했는지, 문제분석조차 하지 않고, 장애인의 탓으로 만들고 장애인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장애인이 피해를 입으면 장애 탓이고, 장애인이 피해를 벗어나면 사회의 보호장치의 강화 실적으로 홍보된다. 지난 14일 양주에서 70대 뇌병변장애인과 80대 시각장애인 자매가 복지서비스를 거부하고 집에서 지내다가 동생이 사망하고 언니는 탈진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자매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이지만, 요양시설로 보내준다는 것도 거부하고, 장애 재진단도 거부하여 장애인등록이 취소되고, 요양서비스도 거부하고 집안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다가 일어난 사건이라고 했다.

집안의 청결 상태가 엉망이어서 벌레가 득실대고 복지서비스가 간절히 필요한 상태였으나, 당사자가 스스로 거부한 것이므로 아무리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하여도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다고도 했다.

장애인 중에는 활동지원서비스를 잘 이용하여 독립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이러한 서비스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에는 활동지원서비스를 요청했으나, 정해진 활동지원사와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마음의 문을 닫고 서비스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장애 정도가 심하거나 캐어해야 하는 업무의 강도가 심하거나 심한 자폐성 장애 등 소통이 어려워 활동지원사를 구하지 못해 마음의 상처가 되어 서비스를 포기하고 거부하는 자세로 마음을 먹어버린 경우도 있다.

65세가 지나 노인요양으로 이동하면서 필요한 서비스가 축소되어 정책에 대해 불신을 하게 되고, 이제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면서 잊혀지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문을 닫아 잠그고 서비스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장애인연금을 받다가 65세가 도래하여 노령연금을 추가로 받는 줄 알았다가 노령연금을 주는 만큼 소득으로 계산하여 다른 현금 서비스를 축소한다는 화나는 일을 당하고 더 이상 서비스를 거부하고 온몸으로 저항하면서 서비스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평생 뇌병변으로 살았는데, 노인이 되어도 다시 장애인진단을 받으라고 하니 자신이 무슨 속임수를 쓰는지 요주의 인물처럼 취급당한다는 생각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은 어려워도 거부하면서 살아보겠다고 저항감을 넘어 적개심을 가지고 마음의 문과 집안의 문을 닫아 잠그는 사람도 있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이 자신에게 너무나 필요한 서비스임에도 거부하는 이유는 분명 있다. 단순 경계심에서 거부감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분명 복지 전달체계에서의 접근성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까지 포함하여 복지는 해결해야 하는데, 거부한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며 거부한 장애인 탓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복지가 친절하지 못하고, 통제하는 고자세이며, 공급자 중심의 감독자 위치에서 이루어짐을 여실히 드러내는 결과이다.

노인요양시설로 가지 않겠다고 거부하면서 스스로 고립된 이유가 단순한 경계심이나 두려움일까? 아니면 요양원에서의 물건 취급당함과 장애에 대한 차별 경험 등 치유되지 않으면 해소되지 않는 거부감이 자란 결과는 아닐까? 서로 자매가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며 서로만 의지하고 믿을 수 있었던 그 상황에 대해 복지전문가는 아무런 반성도 없이 단순히 장애인 스스로의 문제나 독특한 장애인의 고집으로만 여겨도 되는 것인가? 평행 의지해 온 유일한 가족의 이별을 전제로 한 보호시설은 아니었을까?

사각지대는 신청주의에 의해 신청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접근성의 문제나 정보 부족의 문제, 복지서비스 혜택을 필요한 사람이 제대로 받는지에 대한 복지서비스 보완적 후견 감시의 문제, 정책의 부재로 인한 그 영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한 서비스 부족 문제 등 복잡한 문제들로 엮여 있다.

그리고 정부나 지자체 등의 복지를 믿지 못하는 상처받은 거부자들의 온몸으로 저항하는 문을 닫아버린 이들의 마음을 여는 것 역시 복지의 영역이라는 것을 전문가나 행정가는 깊이 헤아리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재난 참사의 예방을 하지 못한 책임이 국가에 있다면, 복지의 혜택을 보지 못하거나 혜택을 포기하거나 거부한 사람들의 피해나 희생의 예방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권리를 누리지 못한 책임 역시 국가가 져야 할 것이다. 그런 기능을 하라고 복지가 존재하는 것인데, 단지 취약계층에 대한 사업만 한다고 복지라면 그 복지는 사회적 의무나 책임을 외면하고 딴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복지가 정교한 기계가 되기만 하면 복지가 모두 해결된다고 여긴다면, 복지 행정이나 복지전문가는 훌륭한 기계조작자는 될 수 있어도 복지의 의미나 철학이나 인간성이나 권리 실현이라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계속 불량품만 만들어낼 것이다. 복지 사각지대는 대상자에게 혜택을 제대로 주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복지 자체의 기능 부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승에서 행복할 수 없다고 떠나는 사람에게 복지는 기만일 뿐이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